남편·자식에 밀려 아내의 노후가 없다
이 름 : 관리자
시 간 : 2005-11-24 08:51:21
|
조회수 : 2485
남편·자식에 밀려 아내의 노후가 없다
제2의 인생이 기다린다 | 여성
한국 여성, 남성보다 평균수명 7년 길어... 남편 사후 생계대책 미리 준비해야
서울 방배동 판자촌에 사는 오모(78) 할머니는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는 자원봉사자와 이야기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여느 때는 방 안에 앉아 문 밖만 내다보다 때되면 혼자 밥 먹고 어두워지면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잠드는 것이 일과의 전부다. “남편 죽고나서 있던 집 팔아 장남의 사업 밑천을 대줬더니, 글쎄 돈 다 까먹고 어디로 숨어버렸어. 아들 둘 더 있는데 다들 사는 형편이 어려워서 나타나지도 않고…, 늘그막에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자원봉사자들에게 늘어놓는 할머니의 넋두리는 끝이 없다. 자식이 있단 이유로 기초생활수급자 대상에도 오르지 못해 매달 10만원씩 지원해주는 복지단체의 도움으로 근근이 생활하는 할머니는 “젊었을 때 미리 미리 준비해 놓아라” “자식이고 남편이고 떠나면 그만이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산다.
여성 노인의 무방비한 노후대책을 두고 위험경고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남편과 자식 건사에 정작 자신의 노후 문제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들 앞에 닥친 현실은 이미 위기 상태다.
충청남도 온양에 사는 최모(67) 할머니는 얼마 전 다리 골절로 병원에 입원했다. 인근 지역 공사장에서 일당 2만원씩을 받고 잡역을 하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할머니의 남편은 3년 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 죽은 뒤에 혼자 농사지을 여력이 안되서 땅을 팔았어요. 땅 판 돈이 제법 돼서 나 혼자 살기 걱정 없겠다 생각했는데, 아들 딸들이 ‘저희들 사는 형편 어려우니 도와달라’며 몇 번 손 벌려 조금씩 떼어주다 보니까 남는 게 없더라고요. 통장에 몇 푼 남은 거는 내가 더 늙어 일할 기력마저 없으면 쓰려고 자식에게 말 안했어요. 그래서 당장 먹고 살 돈 벌려고 공사장 나갔다가 사고를 당했어요.” 최씨는 “동네에 집이 네 채 있는데 그 중 세 집에 할머니 혼자만 산다”며 “다들 공사장이나 가까운 공장에 나가 허드렛일 해서 생활비를 번다”고 말했다.
일할 기운도 없는 노인은 자식이 매달 보내주는 용돈에 생계를 맡겨야 한다. 실례로 대전시 노인 생활 실태 조사에 따르면 여성노인의 70.1%가 노후계획에 대한 준비가 전무한 상태이며 이들 중 한 달 용돈 10만원 이상인 노인은 45% 수준이고 나머지는 5만원 미만인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한 달 용돈 1만원 이하 노인도 전체의 6.1%를 차지한 것으로 조사됐다.
자녀교육비에 노후대책은 뒷전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남자가 73세, 여자가 80세로 여자가 남자보다 7세나 더 오래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남편 사후의 노후 대책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어 문제로 지적된다.
서울 동작구에 사는 전업주부 이원미(36)씨는 자신의 노후대책에 대한 질문에 “남편이 개인연금도 들고 보험도 들어놨다. 집 있으니까 급하면 그거라도 팔아서 살면 된다”고 답했다. 만약 남편 사후에는 어떻게 할지를 물었을 때는 “아들 있으니까 같이 살겠다”며 역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잘 키운 아들 하나가 보험보다 낫다는 것이 이씨의 생각이다.
서울 강동구에 사는 주부 김진선(48)씨는 “아들 있는 엄마들은 노후 걱정은 안해도 아들 장가보낼 때 집 사줄 걱정은 하는 것이 요즘 세태”라고 말했다. “저는 딸만 둘인데 ‘대학졸업한 다음에는 너희들 힘으로 살라’고 자주 말하고 있어요. 딸 덕 볼 생각은 아예 꿈도 안꾸니까 노후에 대한 걱정이 아무래도 아들 있는 엄마들보다는 큰 것 같아요.”
그렇다고 김씨의 사정이 더 나은 것은 아니다. 30대 중반에 현재 강동구에 있는 40평짜리 아파트를 장만한 뒤 5년 동안 대출금 갚느라 돈 모을 새가 없었고 40대 들어서는 두 딸 교육비로 버는 돈이 모두 들어갔다. 현재 두 딸은 대학교 4학년과 2학년. 한 해에 두 딸 등록금으로 들어가는 돈만 2000만원 가까이 돼 여전히 수중에 쥔 목돈은 없다. 대학졸업 시키고 나면 그때부터 차근차근 모을 것이라고 하지만 남편이 무사히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소규모 무역 회사의 과장으로 일하는 여성 이모(43)씨는 혼자서 중학교 1학년인 딸을 키우고 있다. 그런데 전 남편이 매달 보내오는 얼마간의 자녀교육비까지 합쳐 한 달 수입은 두 사람이 살기 부족한 액수가 아니지만 통장은 늘 마이너스다. “사교육비 부담이 커요. 돈 없다고 안 가르칠 수도 없고 남들 하는 만큼은 해주려고 하는데 그게 만만치 않더군요. 거기다 대출금도 월급에서 조금씩 떼어 갚고 있어 남는 게 없죠. 노후대책 시급한 건 알아도 당장 형편이 안 되는데 뭘 어떻게 하겠어요.”
이씨는 매달 10만원씩 나가는 개인연금과 건강보험 두 개가 자신의 노후보장책 전부라고 털어놨다. 나이 들어 국민연금 받을 것을 계산해보니 한 달 수입이 60만원 조금 넘게 나왔다. 20년 후 물가를 고려해 봤을 때 60만원의 가치는 지금의 절반 수준이라 살길이 막막하다. 그래도 딸자식 하나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키우겠다는 것이 그의 현재 목표다.
아직도 남편 이름으로 보험 드는 사람들
노후를 위해 황혼 재혼을 하는 이들도 있다. 남편과 사별하거나 이혼한 뒤 혼자 살다가 생계 때문에 재혼을 하는 경우다.
분당에 사는 최모(62)씨는 2년 전 오랜 지병으로 병원 신세를 지던 남편과 사별했다. 그러나 떠나간 남편에 대한 애도의 심정보다 당장 눈앞에 닥친 생계가 최씨에겐 더 큰 문제였다. 살고 있던 조그만 단독주택을 팔아 전세로 집을 옮기고 병원비를 대던 터라 수입원이 전혀 없었다. 남편 사후에 월세로 거처를 옮겼지만 생활비는 금새 바닥났다. 결혼해서 살고 있는 딸이 있어도 사위 눈치가 보여 딸네 집에 들어갈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단다. 그러던 최씨는 얼마 전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 김모(69)씨와 재혼을 했다. “이 양반이 아들 장가보내야 하는데 홀아비 모시기 싫다고 여자 쪽에서 반대를 했다나봐요. 자식 때문에 재혼을 생각하던 중에 아는 사람 소개로 저를 만난 거죠. 그런데 제가 호적에 올라가면 이 사람 죽은 뒤에 유산이 저에게 상속된다고 아들이 반대해서 혼인신고도 못했어요. 이렇게 살아야만 하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산 목숨 끊을 수도 없고….” 최씨는 젊었을 때 남편만 믿고 의지한 것이 죄라고 자신만 원망할 뿐이다.
요즘 젊은 부부들은 재산을 부부 공동명의로 하거나 20대 후반부터 철저하게 노후대책을 위한 재테크에 열을 올리지만 이미 중년에 접어든 부부들은 재산을 남편 명의로만 해놓기 일쑤다.
ING생명 홍익지점의 최용욱 지점장은 “요즘 노후 대비 상품으로 변액보험 가입률이 높아지고 있는데 아직도 상당수가 남편 이름으로 보험을 신청한다”며 “부부 중 더 오래 사는 쪽의 명의를 쓰는 것이 유리하다고 설명해도 중년 이상 연령층에서는 무조건 남편 이름으로 신청하는 경우가 50% 이상”이라고 했다.
“40대 중반 넘어선 분이 노후를 위해 상담을 하러 많이 오십니다. 그러나 이미 시기적으로도 늦은 데다 대개 남자분 혼자 오거나 부부가 같이 오지 여자 혼자 오는 경우는 드뭅니다. 아내의 노후만 따로 떼어 걱정하는 것은 더욱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최 지점장은 철저한 생애 계획을 세워놓지 않으면 노후의 문제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며 하루라도 젊었을 때 노후대책을 세우는 것이 최선이라고 했다.
주간조선
이선정 자유기고가(sjlgh01@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