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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머니를 떠나 보내다
이  름 : 김혜옥
시  간 : 2004-04-01 03:01:42 | 조회수 : 951
하동이 고향이면서..
유년시절을 부산에서 보내며...

향학열에 서울을 밟게된 이후 , 결혼하고 눌러앉아..사랑하는 우리 할머니를 거리가 멀답시고 ,,아니 눈물로서 보내기가 싫어서.. 양로원 입소날짜를 놓쳐 할머니의 목소리도 못듣고 시간은 그렇게 지나 버렸다..

일과 결혼생활이란 이렇게 친정 할머니께 까지 미치지 못한다.
하동 양로원에 그리운 할머니를 예전처럼 통화 연결됨을 믿고,  미루고 또 미루고..

메모된 담당 관리주임 김국환님과의 상세한 입소과정과 가족의 일원으로서 첫통화를 하였다.

낮에 할머니와의 전화연결은 목욕중~으로 저녁으로 이뤄졌다.
"아 여보시요~~~~누고?
할매 나야~ 잘있지? 외롭지 않지? 친구들 많지?..
**********************
대쪽같고 남에게 싫은소리 안들어려는 키작고 장수하실 "이삼녀" 할머니 ..
그곳이 좋아도 일단 좋단말 안하신다.

나의말에 아량곳없이 오빠에게 무얼 못받았냐고,,되물어셨다.입소전 친척과 오빠가족이 가시는 할머니를 맞았다.

할머닌 반가이 맞으시는데 나는 왠지 죄지은 느낌이다.
오빠도 있고 큰언니도 있는데...

할머니는 늘 언니,오빠에게 서운타했다.그나마 내가 전화자주하니 그럴수 밖에 없었다.
각자 일하며 생활에바뿐 언니,오빠성격들을 늘 이해하라고 했고,
맘은 있어도 더 미안해서 전화를 못하는 것인데..당신은 손녀,손자 전화만,기다리며
나의 전화는 유일한 낙이었다.

안채엔 큰집 사랑채엔 할머니가 집을 따로지어혼자 사셨다.

언제나 할머니에겐 정신적 지주였던 나..친구이자 손녀였다
용돈도 보내드리고 일주일에한번씩 또는 두번씩~내손안에 키운 손자손녀 밖에
몰라,막내손자 일이잘 안풀려 연락두절인 걸 늘 안타까워 하며 맘에 걸려 하셨는데..

엄한유교 김씨 집안에 둘째 할머니로 시집오신 할머니~
자식을 낳지 못하였고 둘째아들격인 우리아버지 <돌아가신> 집에 함께 살았었다.

우리 다섯명 손자손녀를 키우시기도 하셨고,그래서 큰집 손자보다 우리들을 더 챙기시고 늘 걱정 하신걸 난 안다. 엄마를 먼저 하늘로 보내시던날 비보를 전해듣고   대성통곡하셨던 할머니~~.

둘째아이 3개월 임신때 난 할머니가 너무 보고싶어 후배랑 하동으로 여행을 갔다.

내가 좋아하는 갖가지 해물음식에 깊고 손끝맛인 할머니의 그 음식을 난 잊지 못한다.큰아이 산후조리를 난 엄마가아팠으므로 할머니를 자청해서 서울로 올라오시게했다.

서울은 감옥살이 같아 도저히 못살거 같다며..일주일 계시고 하동으로 가셨다.
오빠가 모신다 해도 당신이 도시생활을 적응 못하심이다.

저녁에 첫 통화에서 오빠에게 팔찌를 받았냐고...할머니가 내게 주고가셨나보다. ..
좋은건 모두 손자,손녀에게 남기고 홀로 편히 하동노인 요양원으로 향하셨나보다.

난 순간 생각했다.할머니의 근황과 소식을 볼수 있으려면 요양원 홈 을 찾으면 가능 하겠다고~~~~

밤늦게 접속했다..푸른초장에 빨간 벽돌로된 우리 할머니집<여기>이 아늑하게 보여졌고 원장님을 비롯하여 시설의 현황과 직원을 한눈에 볼수있음이 너무 좋았다.

내가사는 일산 노인복지시설 못지 않았다.
난지금 우리 할머니의 관한글을 올리면서 할머니가 보고싶음 이곳을 온다는게
너무 기뻐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 할수가 없다. 언니,오빠에게도 알려줘야지.

벌써내가 보고싶어신가? 언제한번 안올거냐고 되 물어신다.
가시기전에 서울은 너무 멀다며 오지말고 이다음 양로원으로 오라 하셨는데...

시간내어 언제 갈 계획이다.
우리 할머니를 위해서 내가 오프라인에서 할수 있는게 무엇일까?

하나님이 주신 나의 은사는 정신요양원,장애특수유치원 미용봉사와 교회 성전꽃꽃이인데......

할머니를 면회 가는날 ! 그날 할머님들  머리손질과 그 계절에 맞는 꽃꽃이 봉사를
약속해 본다.                                   ==늦은 새벽에 우리 할머니를 그리면서===